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 하지만 저에게 허구의 이야기란 바다와 육지에서의 감동적인 사건들에 대한 것입니다. 전 이런 이야기가 경험하지 못한 낯선 세계로 저를 데려다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으로서 전 독자들에게 역시 같은 일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 현실도피가 아니냐고요. 물론 도피 맞습니다. 왜 다들 이걸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어요. 현실도피는 모든 예술, 아니 모든 문명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문명은 현실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의 망상과 노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니, 현실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건 다른 모든 의식 있는 존재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셜리 잭슨의 호러 장편 <힐 하우스의 유령>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되지요. “그 어떤 생명체도 절대적 현실에 갇힌 채로 살아간다면 광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 그럴 리가요. 무언가 예술이라고 불린다면 그건 예술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 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세상엔 존재 자체가 공해인 수많은 영화, 소설, 음악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예술이 아닌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들이 예술이라고 해서 아침 산책이나 떡볶이 간식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게임이 가치 있고 중요한 무언가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것이 예술이라고 우기는 대신 일반적인 예술이 커버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나아요. 적어도 그게 당시 제 주장이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게임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냐고요? 아뇨, 전 이야기를 다루는 영역에서 예술의 비중이 그렇게 높을 필요가 없으며 앞으로 예술의 비중은 점점 더 낮아질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예술로 보는 것은 다소 기형적인 생산과 소비의 구조 때문입니다. 이 구조 안에서는 검증받은 소수의 창작자가 이야기를 생산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걸 수동적으로 소비하죠. (...) 요새 느끼는 건 지금까지 소수의 창작자만 누렸던 즐거움을 일반 대중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의 챕터에서 말했지만 수많은 사람이 전에는 쓰지 않았던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여전히 훌륭한 작품들은 만들어질 것이고 운이 좋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감상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영역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질 거예요. 고정된 이야기들을 얌전히 감상하는 사람들보다 살아 숨쉬는 이야기들이 꿈틀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투쟁하다가 소멸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해 즐기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세계가 된다면 어디에나 널려 있는 창작자보다 이야기 규칙, 그러니까 우주의 창조자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이 미래를 진지하게 믿냐고요? 아뇨, 전 지금 지하철 안에서 아이폰을 두드리며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겁니다.


🔖 문제는 그럴 능력이 없거나 그런 것을 이해할 생각이 없는 소비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 “여자 주인공엔 감정이입을 못 해요.”라고 아주 태평스럽게 말하는 남자들을 의외로 많이 만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죠. 하지만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들이 뭉쳐 모인 영토가 의외로 넓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토는 결코 호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안정된 놀이터를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어느 곳에나 있죠.

그들은 당연히 장르의 탐험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 소설 몇 권 정도의 배경이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처럼 몇십 년을 끌면서 성장하는 프랜차이즈의 우주라면 그 우주를 끊임없이 수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그 세계가 그나마 덜 이상해 보이고 말이 되기 때문이죠. 그러는 동안 세계는 일관성을 잃고 팬들이 좋아했던 이전의 모습을 잃는데, 이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이런 수정이 없다 해도 세상은 원래 바뀌는 법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를 견뎌내지 못하는 부류가 있죠.


🔖 하지만 창작자는 시대에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매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죠. 아무리 자칭 골수팬이 이를 갈아도 소용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희생자들입니다. 모두를 얼러대며 챙길 수는 없어요. 가망 없으면 버리고 가야지. 시대에 자신을 맞추려는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의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드 퍼피즈의 발악이 진정된 이후인 2016년과 2017년 휴고상의 주요 부문은 여성 작가들이 휩쓸었습니다. 그중에는 흑인 작가와 중국어권 작가도 포함되어 있었죠.


🔖 허구의 세계가 젊음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관과 아이디어를 가진 세대를 받아들이고 늙은이들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변화한 세계는 아무리 훌륭해도 분명 근본주의자 팬덤에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을 굳이 신경 써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 전 여전히 훌륭한 이야기의 가치와 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 대부분은 무뚝뚝함과 불친절함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접했던 훌륭한 서사 예술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돌이켜보세요. 그리고 그 경험이 어땠는지도. 감상이 끝난 뒤 여러분의 일부가 된 작품들도 여러분이 원하는 것만 주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늘 원치 않은 상황과 마주치고 그 이야기가 전달하는 메시지 역시 여러분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어쩔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세상과 이야기꾼과 여러분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이야기와 메시지의 힘이 생기는 거죠. 캐릭터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캐릭터들은 조종할 수 있는 게임 캐릭터와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변화할 수 없는 과거에 지배당하고 툭하면 끔찍한 선택을 하며 그들의 욕망은 온전히 충족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피엔딩에 도달한다 해도 마찬가지죠.

훌륭한 장르물 창작자들은 이를 잊지 않습니다. 이들은 판타지만을 창조해내지 않아요. 세상을 뒤트는 힘을 이용해 더 큰 불안과 불만족과 질문을 창조해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술과 이야기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그들이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까요?


📝 듀나의 말에 따르면 로맨스는 너무 넓어서 장르가 아니고 만약 이 책에서 로맨스를 다루었다면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 이야기를 채웠을 거라고. <제인 에어>의 모방작이지만 샬럿 브론테가 절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영역으로 돌진하는 작품.